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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貫祖) 휘 시흥(時興)께서 김녕군(金寧君)으로 봉군(封君) 받으신 김녕(金寧)이라는 지명(地名)은 지금의 김해(金海)인데, 그 김녕(金寧)은 관조께서 봉군 받으신 때를 고려 원종(高麗元宗)때라 볼때 다음 연혁(沿革)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 二十년 후부터 금주(金州), 안동(安東), 분성(盆城)등으로 자주 바뀌다가 충선왕(忠宣王) 二년(一三一○)에 김해(金海)로 바뀌어 일관(一貫)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도 자연 그 당시의 지명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한 편 시조(始祖)가 전혀 다른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후예들도 그 본관을 김해(金海)로 써오고 있었으므로 양 김씨(金氏)를 구별하기 위하여 사회에서 수로왕이 먼저라 하여 그 후손을 선김(先金)이라 하고, 김녕군(金寧君)이 나중이라 하여 그 후손을 후김(後金)이라 하였다.

그러나 같은 본관(本貫)을 쓰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 양 김씨(金氏)의 후손들이 번창하여지자 여러 가지의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김녕군 후손들은 대종가(大宗家)를 중심으로 조선 헌종(朝鮮憲宗) 十五년(一八四九)과 고종(高宗) 二十一년(一八八四) 두 차례에 걸쳐 정부(政府)에 청원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아, 관조(貫祖)께서 봉군(封君) 받으실 당시의 김해(金海)의 읍호(邑號)인 김녕(金寧)을 다시 찾아 본관(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통통신(交通通信)시설이 전무(全無)하던 그 시기에 전국의 후손들은 본관(本貫)이 복관(復貫) 된지도 모른 채 겨우 비준(批准) 十년 후인 고종(高宗) 三十三년(一八九六)에 민적령(民籍令)을 만났으니 그 신고된 본관이 김해(金海)나 분성(盆城)이였던 분이 많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