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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조사실(顯祖事實)

 

시조대왕(始祖大王) 휘 알지(閼智)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新羅) 제四대 석탈해왕(昔脫解王) 九년(서기六五) 三월 四일 밤에 경주 금성(慶州金城) 서쪽 시림(始林 : 지금의 鷄林)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께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숲에서 닭이 우는 것을 이상히 여기시고 대보(大輔)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호공(瓠公)이 왕의 명(命)을 받고 시림(始林)으로 가보니 한 나뭇가지에 조그마한 금(金)빛의 궤(櫃)가 하나 걸려 있고, 그 밑에서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께서는 곧 사람을 보내어 그 궤(櫃)를 가져오게 하였다.

왕이 그 금궤의 뚜껑을 열어보니 궤 속에는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단정하고 비범(非凡)하였다. 왕께서는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시며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내려 주시는 아들 복(福)이 아니냐?” 하시고 그 아이를 거두어 기르시었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대단히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났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그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金櫃)에서 나셨다 하여 김(金)이라는 성(姓)을 정해 주시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지인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나라 이름도 계림(鷄林)이라 고치셨다. 공(公)은 탈해왕(脫解王)의 태자(太子)로서 대보(大輔) 벼슬에 계셨으나 왕위(王位)를 박파사(朴婆娑)에게 양보하시었다.

뒤에 시조대왕(始祖大王)으로 추존(追尊) 되시었고, 이 후로 모든 후손들이 공을 시조(始祖)로 모시었으며,신라국(新羅國) 五十六왕(王) 중 三十八왕(王)을 그 후손(後孫)이 차지하는 영광(榮光)을 누리었다.

그 비(妃)는 마정부인(摩貞夫人)인데, 석탈해왕(昔脫解王)의 왕자(王子)이신 각간(角干) 강조(康造)의 따님이시다.

우리 김씨(金氏)는 우리 시조(始祖)에 관한 사실(事實)을 앞에서와 같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여 설명 하지만 다소 다른 기록(記錄)들도 있으니 참고로 다음에 몇 가지를 들어 본다.

 

一, 대보공(大輔公) 탄강기(誕降記) (三國遺事篇)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의 승려(僧侶)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중국(中國) 영평(永平) 三년(서기六○년, 脫解王 四년) 八월 四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 서리(月城西里)를 거닐고 있노라니 시림(始林)에 큰 빛이 보이고 자주 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곧게 내리더니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 궤(櫃)가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그 궤에서 광채(光彩)가 나며, 그 나무 아래에서는 흰 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일을 왕에게 아뢰니 왕은 기이(奇異)하게 여기시고 그 곳으로 거동을 하시어서 그 궤를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옛날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일과 같이 그 궤 속에서 한 어린 아이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왕께서 기뻐하시며 그 아이를 안고 대궐(大闕)로 들어오시니 그 길 양편에서는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축하하는 것이었다.

왕께서는 그 아이의 이름을 발한(勃韓) 말을 따서 알지(閼智 : 아기)라 짓고, 성(姓)을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이라 하였다.

그 후 좋은 날을 택하여 그 아기를 태자(太子)로 봉(封)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자란 후에 그 왕위(王位)를 박파사(朴婆娑)에게 양보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리고 알지(閼智)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아서, 六대(代)만인 미추(味鄒)의 대(代)에서 비로소 왕위(王位)에 올랐으니 신라김씨(新羅金氏)는 모두 휘 알지(閼智)의 후손(後孫)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휘 알지(閼智)는 대보(大輔)라는 왕 다음의 지위(地位)에 오르고 또한 대왕(大王)으로 추존(追尊)하여 태조대왕(太祖大王)이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二, 휘 성한(星漢) 시조 설(始祖說)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보다 수 백년 전 신라(新羅) 때 세워진 신라 문무왕(文武王) 비(碑)에는 문무왕의 시조는 문무왕의 十五대조(祖)인 성한왕(星漢王 : 추존)이라고 쓰여있고, 역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먼저 고려 태조(高麗太祖) 때 세워진 진철대사(眞澈大師 : 利巖) 비(碑)에도 계림김씨(鷄林金氏)인 진철대사는 시조가 성한왕(星漢王)이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면 김씨(金氏)의 시조를 성한왕(星漢王)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한왕은 문무왕(文武王)의 一五대조이시니 삼국사기에 휘 알지(閼智)의 아드님이신 세한(勢漢)과 동일인(同一人)이고, 삼국유사에 휘 알지(閼智)의 아드님으로 된 휘 열한(熱漢)과 같은 분이니 어쩌면 성한왕(星漢王)과 휘 알지(閼智) 대보공(大輔公)은 동일인일지도 모를 일이다.

 

三, 시조(始祖) 신인설(神人說)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金庾信) 조(條)에 보면 신라 사람들은 자기들을 소호 김천씨(小昊金天氏)의 후예(後裔)라 하며 성(姓)을 김씨(金氏)라고하였는데 김유신 장군(金庾信將軍)의 비문(碑文)에도 또한 김유신 장군은 헌원(軒轅)의 후예(後裔)이고 소호(小昊)의 사위라 하였으니 남가야(南伽倻)의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도 신라김씨(新羅金氏)와 같은 성(姓)이라고하여 김씨의 시조는 하늘사람(神人)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본 문무왕(文武王) 비(碑)도 성한왕(星漢王)이 하늘에서 온 신인(神人)이라는 입장(立場)을 취하였다.

이들은 모두 왕실(王室)의 선조(先祖)를 신격화(神格化) 하려는 정책적(政策的)인 것으로 보인다.

 

四, 성(姓)의 유래(由來)

중국(中國) 당(唐)나라의 정사(正史)요, 송(宋)나라 인종(仁宗)의 칙명(勅命)으로 구양수(歐陽修)등이 一○六○년 경(頃)에 편찬(編纂)한 신당서(新唐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왕(王)의 성(姓)이 없고 이름만 있었다고 하였다.

또 김서룡(金西龍) 박사의 ‘신라사 연구(新羅史硏究)’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유리왕(儒理王) 九년에 六부(部)의 이름을 고치면서 이(李)씨 최(崔)씨 손(孫)씨 정(鄭)씨 배(裵)씨 설(薛)씨 등의 성(姓)을 하사(下賜)하였다고 하지만, 최(崔)씨 설(薛)씨 등의 성은 신라 왕조(新羅王朝)의 선비들이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거나 유학하려 할 때 성(姓)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당(唐)나라에 있는 큰 성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고, 이(李)씨 정(鄭)씨 손(孫)씨와 같은 성은 신라 시대에는 없었던 성이라 하였다.

신라(新羅) 말(末) 고려(高麗) 초(初)까지는 일반적으로 성(姓)이 보이지 않고 정(鄭)씨 이(李)씨와 같은 성은 고려 중엽(中葉)부터 보이며, 왕실(王室)이 박(朴) 석(昔) 김(金)의 성을 붙인 것은 진흥왕(웅興王) 이후라고 했다.

신라에 한문화(漢文化)가 들어오기 전에는 성(姓)이 없었고, 신라 선비들이 당(唐)나라로 유학(留學)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성이 생겼다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通說)이다.

이렇게 보면 대보공(大輔公) 때나 성한왕(星漢王) 때부터 김씨(金氏)라고 칭(稱)하였다고는 볼 수 없고, 그 후에 소급(遡及)하여 계통(系統)을 찾아 김씨(金氏)의 선조를 댄 것이라고 보이는데, 박(朴) 석(昔) 김(金) 삼성(三姓)이 동족(同族)이었거나 혹은 신라의 원시부족사회(原始部族社會)에 추장(酋長)과 부추장(副酋長)이 있었고, 몽고계(蒙古系) 고대사회(古代社會)에 부왕(副王)이 둘씩 있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패왕(稗王)의 문구(文句)가 보이는데, 추장(酋長)인 왕(王)과 부추장(副酋長)인 패왕(稗王)들이 박씨계(朴氏系) 석씨계(昔氏系) 김씨계(金氏系)에 각각 있었다. 그러나 김씨계(金氏系)는 성한왕(星漢王)이나 대보공(大輔公) 때에 벌써 세력이 확대되어 왕위(王位)의 물망(物望)에 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꼭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보공(大輔公) 이전에도 신라(新羅)에 김씨(金氏)가 왕족(王族)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피력(披瀝)되어 있는 바, 탈해왕(脫解王)의 전왕(前王)인 제三대 유리왕(儒理王)의 비(妃)가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에는 대보공(大輔公)께서 탄강(誕降)한 해로부터 겨우 十五년 후에 등극(登極)한 파사왕(破娑王)의 비(妃)도 김허루(金許婁 : 추존 葛文王)의 따님이라 하였으니 대보공 이전부터 김씨(金氏)는 진한(辰韓)의 일국인 사로국(新羅)의 六촌(村) 중 우세한 부족으로 적어도 패왕(稗王 : 副王)인 갈문왕(葛文王) 등의 왕(王)의 칭호를 붙일만한 지위(地位)를 유지하던 중에 대보공이나 성한왕(星漢王) 때에 와서 그 세력을 넓히고 대대(代代)로 세를 키워 가며 왕비(王妃)를 배출(輩出)하다가 미추왕(味鄒王) 때에 이르러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차츰 중국의 왕실제도(王室制度)를 받아들여 신라왕실(新羅王室)로 하여금 김씨왕실(金氏王室)이 되게 하였다고 보여진다.

신라(新羅)는 처음에 경주(慶州) 지방에 여섯 부족(部族)이 그 주축(主軸)을 이루었는데 이를 六촌(村)이라 불렀다.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한국사(韓國史 : 진단학회발행) 고대편(古代篇)을 보면 六촌(村) 중 김씨(金氏)의 부족은 사량(沙梁)지방에 있었는데, 이 사량은 박혁거세(朴赫居世)의 부인(夫人)인 알영(閼英)이 탄생한 알영정(閼英井)이 있는 곳으로 지금의 남천(南天) 북안(北岸)인 사정리(沙井里)를 중심(中心)한 곳이다.

그러므로 김씨부족(金氏部族)은 남천(南川) 이북(以北) 서천(西川) 이동(以東) 북천(北川 : 閼川) 이남(以南)에 위치하여 박씨부족(朴氏部族)의 급량(及梁)과 남북(南北)으로 대치(對置)하여 밀접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위 한국사(韓國史) 고대편(古代篇)에 김씨를 칭한 것은 임금등 군장 대인(君長大人)의 뜻인 간(干) 감(邯) 금(今) 이사금(尼師今)등 금(錦 : 君長)의 뜻으로 그 음(音)을 따서 금(今)이나 김씨(金氏)라 한 것이라 한다.

 

五, 혼인(婚姻)과 성(姓)

미추왕(味鄒王) 이전에도 왕족(王族) 김씨(金氏)는 처음에 박씨(朴氏) 석씨(昔氏)와 일족(一族)이었을지도 모른다 함은 앞에서 쓴 바이나 모계중심사회(母系中心社會)의 습속(習俗)이 남아 성골(聖骨)만이 왕에 오를 수 있었던 신라 초기에 있어서 미추왕(味鄒王) 이전의 박씨(朴氏) 왕이나 석씨(昔氏) 왕 중에 김씨(金氏)를 비(妃)로 맞거나 어머니와 할머니로 모신 분이 많으니 이는 더욱 분명해졌다.

이미 시조(始祖) 휘 알지(閼智)께서 대보공(大輔公)이 되시고 태자(太子)가 되시었을 때부터 김씨(金氏)의 위치를 알 수 있거니와 제五대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朴氏)의 비(妃)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 김씨요, 제六대왕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 朴氏)의 비(妃) 우례부인(憂禮夫人)도 김씨요, 제九대왕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 昔氏)의 어머니 지진례부인(只珍禮夫人)도 김씨고, 제十一대왕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과 제十二대왕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의 어머니이신 옥모부인(玉帽夫人)도 김씨이니 박혁거세(朴赫居世)이래 미추왕 전 十二왕 중 五왕이 어머니나 비가 김씨란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 김씨는 시조(始祖)이래 미추왕(味鄒王) 대(代)에 이르기까지 신라(新羅)의 대통(大統)을 잇는데 조금의 흠도 없었던 것이다.

 

六, 신라김씨탄강유허비문(新羅金氏誕降遺墟碑文) (번역문)

신라에 역사(歷史)가 없다 하나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는 박․석․김 三성이 나라를 세워 천년이 되었다. 계림은 알지(閼智)공께서 탄생한 땅이다. 지금은 영남(嶺南) 경주부(慶州府)에 속(屬)하여 있다.

세상에 김씨는 알지공을 시조로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지명을 전하나 그 세대와 연혁(沿革)이 역사에 기록된 것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도 있다. 지금 그 비(碑)에 새기므로 대략(大略) 기록한다.

처음 탈해왕(脫解王)때 시림(始林)의 계명(鷄鳴)을 듣고 금궤를 열어 보니 사내아기가 들어 있었다. 왕이 수양하고 이름은 알지(閼智), 사성(賜姓) 김씨(金氏),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쳤다. 알지 七세손 미추(味鄒)가 조분왕녀(助賁王女)를 비(妃)로 삼았고 왕이 무자(無子)이기 때문에 미추(味鄒)가 대신 즉위하니 호는 이사금(尼師今)이요 김씨가 처음 즉위하였다.

미추부터 내물(柰勿) 실성(實聖)을 지나 눌지(訥祗)에 이르니 마립간(麻立干)이라 하고 국민에 우차(牛車)를 쓰게 하였다.

눌지가 돌아가니 아들 자비(慈悲)가 즉위하고 자비가 돌아가니 아들 소지(炤智)가 즉위하여 처음 시장을 세워 사방에 재물을 유통케 하였다. 소지가 돌아가니 아들 지증(智證)이 즉위하여서 사람들의 순장을 금지하고 주군(州郡)에 하명(下命)하여 권농(勸農)하고 소로 밭을 갈게 하였으며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정하고 방언(方言)인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을 왕(王)으로 개칭(改稱)하고 상복(喪服)을 제정(制定)하였다. 왕이 돌아가시니 지증(智證)이라 시호(諡號)하였다. 시호법(諡號法)이 이때 시작(始作)되었다. 왕자 법흥왕(法興王)이 즉위(卽位)하여 율령(律令)을 반포(頒布)하고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制定)하였다.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왕(眞興王)과 진지왕(眞智王)을 지나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러 무자(無子)하니 딸 선덕왕(善德王)이 즉위하고 자제(子弟)를 당(唐)나라 국학(國學)에 입학(入學)시켰다. 선덕왕이 돌아가고 진덕왕(眞德王)이 즉위하니 진평왕의 아우(弟)인 국반(國飯)의 딸이다. 처음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백관복(百官服)을 입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百濟)를 치자고 청하였다. 또 스스로 태평송(泰平頌)을 지어 비단에 글을 짜서 바치니, 당고종이 가상히 여겼다. 처음으로 당년호(唐年號)를 쓰게 하였다.

진덕왕이 돌아가니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즉위하여 무열왕과 당장 소정방(唐將蘇定方)이 같이 백제(百濟)를 멸망시켰다.

무열왕이 돌아가니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고 영부인(令婦人)이 당병(唐兵)과 더불어 중국 의상(中國 衣裳)을 입고 같이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켰다. 역법(曆法)을 반포(頒布)하고 백관사(百官司)와 주군(州郡)의 관인(官印)을 주조(鑄造)하였다. 문무왕이 돌아가고 왕자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請)하니 당무후(唐武后)가 길흉요례(吉凶要禮)를 사본(寫本)하고 문사(文詞)의 채집(採集)은 규계(規誡)에 걸려 五十권을 겨우 작성(作成)하여 하사(下賜)하였다. 신문왕부터 효소왕(孝昭王)을 지나 성덕왕(聖德王)에 이르러 처음 누각시계(漏刻時計)를 제조하고 효성(孝成) 경덕(景德) 혜공(惠恭) 선덕(宣德) 원성왕(元聖王)에 이르러 독서출신법(讀書出身法)을 제정하고 원성(元聖)부터 소성(昭聖), 애장(哀莊), 헌덕(憲德), 흥덕(興德), 희강(僖康), 민애(閔哀), 신무(神武), 문성(文聖), 헌안(憲安), 경문(景文), 헌강(憲康), 정강(定康), 진성(眞聖), 효공(孝恭)을 지나 경순왕에 이르러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려고 하자 왕자는 불가(不可)하다고 간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과인은 고위(孤危)하여 세력이 나라를 지킬 능력(能力)이 없으니 무고한 국민들의 유혈참상을 참아 볼수 없노라” 하고 시랑 김봉휴(侍郞 金封休)를 보내 고려에 상서하여 신(臣)이라 칭(稱)하니 신라는 끊어졌다. 김씨는 三八왕이 五八七년을 지냈으니 박, 석, 두성이 나라를 세우고 지킨 후를 이어받아 가장오래 나라를 누렸다.

예악문물(禮樂文物)이 이때 점점 일어났다. 신라부터 당나라와 교통(交通)할 때 중국 사관법(中國史官法)이 생긴지 이미 오래고 동쪽은 벽지(僻地)로 문장(文章)이 없었다. 그 역사는 많으나 후에 전(傳)하지 못 하였다. 고려 김부식(金富軾)이 신라등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하였으나 대략(大略)을 기록(記錄)하고 학자들은 동국사(東國史)를 연구하지 않았으며 그 판본(板本)도 오래고 훼손(毁損)되어 세상에 남은 것이 드물어 식자(識者)들이 매우 근심한다. 남공철(南公轍)은 아마 영남에 있을 때 참봉 김성걸(參奉 金成杰)이 경주에서 와 뵈옵고 계림기적문(鷄林記蹟文)을 청(請)하니 좋다. 그 근본을 추구(推究)하고 원려(遠慮)함이라 계림은 확고(確固)하니 옳게 전하리라 사적(事績)은 계림보다 큰 것이니 어찌 옳게 쓰지 않겠는가.

공자(孔子)는 주(周)나라에서 탄생하고 은(殷)나라 사람이라 하고 스스로 미자(微子)의 후손(後孫)이라고 말하였다.

또 공자께서 이르기를 하은(夏殷)의 예(禮)는 내가 말할수 있으나 기송(杞宋)은 징험(徵驗)이 부족(不足)하다 하였으니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김씨가 사방(四方)에 흩어져 있어 헤어볼 수 없이 많은데 다 신라 알지를 시조(始祖)로 한다.

공자가 은(殷)나라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어찌 하은(夏殷)의 예(禮)를 말하고 기송(杞宋)은 문헌(文献)의 징험(徵驗)이 부족(不足)하다고 하였겠는가 후에 이 비문을 잘 읽어 보는 사람이 있으면 거의 알고 역사의 관계를 보충하리라.

비명(碑銘) : 울창한 저 계림은 왕을 이르킨 터이다 누가 감히 불경하리요, 내 명(銘)은 비(碑)에 있다.

    조선 순조(朝鮮 純祖) 三년 계해(癸亥. 一八○三) 二월

가의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嘉義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대구도호부사규장각직제학지제교(大邱都護府使奎章閣直提學知製敎) 남공철(南公轍) 찬(撰)

통정대부경주부윤경상도병마절제사(通政大夫慶州府尹慶尙道兵馬節制使) 최헌중(崔献重) 서(書)

 

新羅金氏誕降遺墟碑文(원문)

新羅無史非無史也 由世之人不讀也 新羅朴昔金三姓 立國爲千年 鷄林即閼智誕生之地 今屬嶺南慶州府 世之以金爲氏者 偕以閼智爲始祖東人至今傳其地而 至其始次沿革之 載於史者 或未祥焉 今因其銘碑略識之 初脫解王時 聞始林鷄鳴 得金櫃開而視之 有小男兒在 王乃收養之 名曰閼智賜姓金氏 更名其林曰鷄林 閼智七世孫味鄒 娶助賁王女王無子味鄒遂代立 號尼師今 自味鄒歷奈勿實聖 至訥祗是爲麻立干 敎民服牛車 訥祗薨子慈悲立 慈悲薨子炤智立始開市肆通四方之貨 炤智薨子智證立 禁人殉葬 命州郡勸農 始用牛耕 定國號曰新羅 改方語尼師今麻立干 稱王制喪服 王薨諡智證 諡法始此 子法興王立 頒律令制百官公服 稱年號曰建元 歷眞興眞智眞平王無子 女善德王立遣子於唐 請入國學 善德薨眞德王立 眞平王弟國飯女 始倣唐制爲百官服 遣使告破百濟王 自製太平頌織錦文以献 高宗嘉之 始行唐年號 眞德薨太宗武烈王立 武烈王與唐將蘇定方共滅百濟 武烈王薨子文武王立令婦人服中國衣裳與唐兵 共滅高句麗 頒曆法鑄百司州郡印 文武王薨子神文王立 遣使入唐 請禮典並詞章 唐武后令寫吉凶要禮 採文詞涉於規誡者 勒成五十卷賜之 自神文歷孝昭王 至聖德王 始造漏刻 歷孝成 景德 惠恭 宣德 至元聖王 定讀書出身法 自元聖 歷昭聖 哀莊 憲德 興德 僖康 閔哀 神武 文聖 憲安 景文 憲康 定康 眞聖 孝恭 至敬順王 以國讓高麗 王子以爲不可 王曰寡人孤危 勢不能全 使無辜之民肝腦塗地 吾不忍也 乃遣侍郞金封休 上書稱臣 國遂絶 金氏歷三十八世 凡五百八十七年 蓋承二氏創守之後 亨國最長 其禮樂文物 自此稍起矣 自新羅始通唐時 中國史官之法 立己久矣而東方僻陋無文章 其事多不傳 高麗金富軾 撰羅史 其書略具而 學者不專治東史 又其板本久而 刓毀 行于世者幾稀 君子甚懼焉 公轍之按嶺南也 參奉金氏成自慶州來謁 請鷄林記蹟之文 善哉 其推本而 慮遠也 地固可傳也而 事有大於地者豈可以不書也 孔子生於周而 曰丘殷人也 自以微子之後也又曰夏殷禮 吾能言之 杞宋不足徵也 此文献不足故也 今金氏之散在四方者 無慮千百家而 皆以新羅爲祖 與孔子之於殷 無異也 豈可言夏 殷之禮而 杞宋之献不足徵也 後有善讀此碑者 庶幾取以 補史之闕也

銘曰 菀彼鷄林 興王之基 孰敢不敬 我銘在碑

      朝鮮純祖癸亥(一八○三) 二月

嘉義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大邱都護府使奎章閣直提學知製敎 南公轍 撰

通政大夫慶州府尹慶尙道兵馬節制使 崔献重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