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정(洗塵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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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1건 조회 4,188회 작성일 11-05-13 11:26본문
一九五八년 용찬, 철권 두 후손이 주동이 되어 건립하였다.비용은 철성(哲成) 후손들이 출연하여 부담하였다. 충의공 八세손이고 十六세 기두 철성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一九五八년에 지은 재실이다.
아! 우리 가문(家門)은 백촌선조(白村先祖)의 피화(被禍) 후로 여러 대(代)에 걸쳐 진작(振作)치 못하여 조선(祖先)의 미적(美跡)과 의행(懿行)을 당시(當時)에 능히 천명(闡明)치 못하고 햇볕을 보지 못한지가 무릇 수백년(數百年)이 되었다. 부군(府君)께서 항상 애통(哀痛)해 하기를 마지아니하면서 분개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업(緖業)을 넓히어 개척하고 후손에게 복(福)을 받도록 주선하시니 그 진밀(縉密)한 규모와 깊고 먼 사려(思慮)를 만분(萬分)의 一이라도 상상한다면 잔손(孱孫)들의 금일(今日)까지 보존된 것이 부군(府君)의 끼친 유택(遺澤)이 아닌 것이 없다. 「화란(禍難)은 홀로 다니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부군(府君)의 문자(文字)와 사적(事蹟)에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 보존된 것은 문미(門楣)에 기록된 수구시(數句詩)에 불과하니 실로 무궁한 한(恨)이 되니 곧 이 한 점의 산적(切肉)으로 전정(全鼎)의 맛을 알 것이니 어찌 꼭 많은 것만 귀중(貴重)하겠는가. 이 책을 읽어보면 더욱 오랜 세월이 지나도 마치지 못할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에 여러 종친과 함께 상의하여 성의를 다하여 정자를 마을 앞 높은 언덕에 세우고 기와를 얹고 담을 쌓으니 모두 육간(六間)으로 동서(東西)는 방(房)을 만들고 가운데는 당(堂)을 만들어 세진(洗塵)이란 편액(扁額)을 붙이니 대개 부군(府君)의 유시(遺詩) 가운데 『땅이 깊숙하여 세상 티끌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비록 산수(山水)와 연하(烟霞)의 좋은 경치는 부족할지라도 술을 마시고 시(詩)를 읊는 곳으로는 족히 적합한 곳이니 조선(祖先)의 척강(陟降)하는 영령(英靈)이 거의 반가워하면서 「내게 착한 후손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을해(乙亥一九五八) 봄에 처음 역사를 시작하여 그 해 가을에 공사를 마치니 무릇 六개월(個月)이 걸렸는데 시종(始終) 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일을 감독한 분은 족숙(族叔) 용찬(溶瓚)과 족형(族兄) 철권(喆權) 두 분이다.
어찌 참아 우리집 일을 말하겠는가. 忍說吾家事 天鑑白祖心 平生無愧怍 猿鳥繞雲林
嗚乎吾家自 白祖被禍後連世不振使祖先美跡懿行不能閳明於當時韜光晦彩者凡幾百餘禩矣府君每痛泣不己發憤惕念恢拓緖業垂裕後昆其縉密之規模深遠之思慮可想其萬一則孱孫之得保今日恐莫非府君貽厥之澤也禍不單行府君流落之咳唾入於灰燼存者不過是楣題數句而己實爲無窮之恨二卽此一臠可以知全鼎之味奚貴乎多仰讀此篇益不禁曠世靡逮之疾乃與諸族合謀殫誠僅構棟宇於村前陡回處盖以瓦繚以垣凡六間東西爲防中爲堂扁以洗塵盖取府君遺詩中地僻塵緣斷之義也雖之流峙烟霞之勝足以酣觴㗕詠之有餘矣倘未知陟降之靈庶肯曰余有後乎始役於己亥暮春告訖於其年仲秋凡閱六箇朔而一心無怠始終敦事者族叔溶瓚族兄喆權兩氏也落之日責余以記事余雖無狀旣在胄鬯之地不敢辞略記首末如是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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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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