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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온당(淸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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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4,089회 작성일 11-05-1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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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온당(淸溫堂) - 배향 : 창녕 직신문중 시화(時華)공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직신리



백촌선조의 十二세손인 시화(時華)공을 모시는 재실이다. 공은 백촌선조의 十六세손이고 상지(尙之)공의 九세손이고 서현(徐見)공의 八세손이다.


청온당기(淸溫堂記)

우리 김씨(金氏)는 선조(先祖) 백촌선생(白村先生)이 단종(端宗)때 충절(忠節)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신 뒤로부터 자손(子孫)들이 사방(四方)으로 흩어져 숨어 살았다.

十四세조 충립(忠立)공은 상주(尙州)에서 사셨고 十二세조 서견(徐見)공은 상주(尙州)에서 창녕(昌寧)으로 이거(移居)하셨으니 그 어른이 사시던 곳은 직교신촌(直橋新村)이다. 五세조 시화(時華)공으로부터 비로소 자손(子孫)들이 고향(故鄕)을 지키고 살아서 호(戶) 수(數)가  수십호(數十戶)로 늘어났다. 그러나 거개(擧皆)가 빈약(貧弱)해서 오랫동안 내사(內舍)가 없었다. 그러므로 선부노(先父老)들이 이를 개탄(慨嘆)만하고 뜻을 이루지 못 한 것이다. 지난 병인년(丙寅年) 봄에 비로소 사간(四間)집을 마을 가운데 짓고 선조(先祖)를 제사(祭祀)하여 후생(後生)들을 가르치는 처소(處所)로 삼고 청온(淸溫)으로 안(顔)하였으니 대개 그 지명(地名)을 인록(因綠)한 것은 순전(舜典) 서경순전(書經舜典)에 정직(正直)하면서도 청백(淸白)하고 정직(正直)하면서도 온유(溫柔)해야 한다는 뜻을 취(取)한 것이다. 적이 내혼자 생각해 보니 정직(正直)은 온유(溫柔)를 거느린 주재(主宰)이니 청백(淸白)은 정직(正直)의 공효(功効)가 되고 온유(溫柔)는 정직(正直)의 보편(補偏)이 된다. 그러나 이미 청온(淸溫)으로 편액(扁額)을 걸었고 또 이것으로 제교(祭敎)의 주재(主宰)로 삼은 것이 분명(分明)하니 비(譬)하건데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은 것과 같다 그러나 양의(兩儀)가 또 사상(四象)을 낳았으니 어찌 사상(四象)의 태극(太極)이 되지 아니하리오. 대개(大慨) 이른바 청(淸)은 탁(濁)의 반대(反對)이니 제사(祭祀) 지내는 일을 주(主)로 한 것이요, 온(溫)은 완(頑)의 반대(反對)이니 교육(敎育)하는 일을 주(主)로 한 것이다.제사(祭祀)를 지내면서 청백(淸白)하지 못하면 그 마음 오탁(汚濁)해서 사욕(私慾)이 간작(間作)하므로 귀신(鬼神)과 소명(昭明)한 곳에서 교제(交際)할 수 없고 교육(敎育)하면서 온유(溫柔)하지 못하면 그 기질(氣質)이 완경(頑梗)해서 폭려(暴厲)가 틈을 타므로 덕성(德性)을 융화(融和)한 곳에서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완(頑)을 다스리고 탁(濁)을 다스리는데 성경(誠敬)만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성(誠)과 경(敬)을 아는 사람의 주일무적(主一無適)한 것이다. 마음에 사곡(私曲)이 없는 사람을 이르되 마음이라 한 것이다. 마음에 사곡(私曲)이 없는 것이 직(直)의 골자(骨子)이고 온청(溫淸)이 생기는 까닭이 될 것이다. 우리 일가 여러분들이 장차 어떻게 청온당(淸溫堂) 이름에 버금 할 지 알 수 없으나 만약일시(萬若一時)의 문구(文具)에 붙여 헛된 성세(聲勢)뿐이라면 일전(日前)의 미봉책(彌縫策)을 비록 도모(圖謨)할지라도 장래(將來)의 광란(狂瀾)이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인정(人情)과 풍속(風俗)이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같지 아니 함이랴. 오직 바라건대 제군(諸君)은 분신노력(奮身努力)하여 절대(絶對)로 앞을 보고 뒤로 돌아 보지 말 것이며, 분명(分明)히 성모(聖謨)가 나를 속이지 아니한다는 것을 알고, 기어(期於)히 마음을 청백(淸白)히 하고 기질(氣質)을 온유(溫柔)하게 해서 정직(正直)한 사람이 된 뒤에 그친다면, 위로는 충현(忠賢)한 조상(祖上)을 저버림이 없을 것이요, 아래로는 청온(淸溫)으로 편액(扁額)을 건 이 당(堂)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정묘년(丁卯年) 봄에
오세손 두경(五世孫 斗璟)은 삼가씀


淸溫堂記

吾金自先祖白村先生爲莊陵立節之後散落四方惟遯是務十四世祖考諱忠立隱于尙州十二世祖考諱徐見自尙州轉徙昌寧其居直橋新村自五世祖考諱時華始云子孫世守桑梓而戶亦至數十然率皆貧弱久無丙舍此先父老之有慨於此齋志未就者也粵在丙寅春始起五楹之堂於村之中而爲祭先祖敎後生之所顔之曰淸溫盖因地名而取舜典直而惟淸直而溫之義也窍嘗直者統是淸溫之主宰而淸固爲直之功効溫固爲直之補偏者然今旣以此爲揭亦可以此爲祭敎之主也明矣譬如太極生兩儀然兩儀又生四象則豈不爲此四象之太極也乎夫所謂淸者濁之反而主於祭祀之事溫者頑之反而主於敎育之事祭而非淸則其心汚濁而私慾間之故無以敎鬼神於昭明之域敎而非溫則其氣頑梗而暴厲乘之故無以養德性於融化之地但所以治頑治濁之力莫如自誠敬中入乎而是知誠與敬者主一無適心無私曲之謂心無私曲乃是直之骨子而又可爲溫淸之所由生也未知吾宗諸君其將何以副是堂之名也若或付之於一時文具而虛聲勢而己則目前之彌縫雖或可圖而將來之狂瀾豈不可畏也况今人情風俗月異而歲不同者乎惟願諸君益奮身努力切勿瞻前顧後而的知聖謨之必不我欺期欲至於心心淸氣必溫而終歸於一直字而後己則庶幾上無負於忠賢之祖下無愧於淸溫之揭是堂也
丁卯春
五世孫 斗璟 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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