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재(水月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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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845회 작성일 11-05-13 11:13본문
공의 휘(諱)는 익상(益祥)이고 첨지중추부사 논학(論鶴)공의 현손이다.
후손들이 성의를 다하여 좋은 길지(吉地)를 골라 새 재실을 지으니 이곳은 김녕김공(金寧金公) 휘(諱) 익상(益祥)공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규모는 삼간(三間)으로 좌우(左右)에 방이 있고 가운데는 청이 있으며 담장으로 둘러 쌓여 마당이 평탄하고 뒤편으로는 산이 있고 좌편(左便)에는 심천강(深川江)이 흐르며 안산(案山)은 반월(半月)이니 참으로 천하(天下)의 명승지(名勝地)이다. 이로부터 대대로 명공거향(名公巨鄕)이 끊이지 않았으며 九세손 휘(諱) 문기(文起)공께서는 세종조(世宗朝)의 명신(名臣)으로 단종복위를 모의한 육신(六臣)을 영도하시다가 아들 현감 현석(玄錫)공과 함께 순절하시었다. 그로부터 자손(子孫)들은 사방으로 유리(遊離)하였으니 공(公)은 즉 충의공의 八세손이시면서 영동(永同)을 떠나 영남 초계(草溪)를 거쳐 진주 대평(大坪)에 정착하신 입향조(入鄕祖) 계옥(啓玉)공의 손자시다. 공(公)은 농사와 어초(漁樵)로 업을 삼으시고 청렴으로 평생을 살으시다가 돌아가시니 영곡면(永谷面) 자매리(紫梅里) 제마곡(啼馬谷) 임좌(壬坐)에 장사를 모시고 후손은 해마다 성묘와 제사를 드렸으나 아쉬움은 자손(子孫)들이 모여 제숙(齊宿)할 곳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이에 九세손 갑윤(甲潤) 을병(乙丙)이 선도(先導)하여 여러 일가(一家)들과 의논하여 자금을 모아 경오년(庚午一九九○) 五월에 재사(齋舍) 건립에 착수하여 같은 해 十월에 낙성(落成)하니 가히 불일성(不日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오직 후손들의 두터운 돈목과 선조를 받드는 지극한 정성이 아니겠는가. 재실 이름을 영월(永月)이라한 것은 공(公)께서 평생 은둔 생활을 하시며 농사와 독서에 전념하여 남의 도움을 싫어하고 오직 자수(自手)로 성가(成家)함을 꾀하였으며 지명(地名)도 우연히 부합된 것이다. 또 앞날이 양양하여 후손들이 더욱 창성함을 바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금후(今後)로도 후손들은 선조 받드는데 성의를 다하여 백세(百世)까지 민몰치 않을 것이며 일가(一家)의 화목한 기쁨이 변함없이 무궁하리라
擇吉地乃構新齋卽金寧金公諱益祥寓墓所也爲制三間房左右廳其中央外繞以廊庭則平垣背北明堂 幽宅抱其大江眺望水月川所謂地有勝矣名齋公之鼻祖新羅大輔公諱閼智後璿源世系敬順王之八世孫文烈公諱時興以勳封金寧君逐爲貫焉自後圭組蟬聯傳之九世孫諡忠毅號白村諱文起公端宗復位謀議縣監諱玄錫公同時殉節以來子姓遊離四方公卽忠毅公之八世孫而自永同移于嶠南草溪臨居轉普之大坪定着入鄕祖諱啓玉公孫子諱益祥公以農事漁樵爲業以終其葬于水谷紫梅里啼馬谷寓墓壬坐之原裔孫省掃每歲薦一祀而常恨無齋宿之處矣公之九世孫甲潤乙丙慨然于此與諸族合謀鳩財積誠經始庚午三月而飮落于同年十月可謂不日成矣其無昆仍之孝思能然乎哉顏曰水月齋盖取於公之隱處耕讀不求榮名故聲聞之振而儉拙自成一家且地名之偶符洋洋永世乎其義深㘦矣今後後孫之極盡慕先之誠百世不泯也仍作花樹之歡不替於無窮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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