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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재(華岡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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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915회 작성일 11-05-1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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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재(華岡齋) - 진주 향양문중 오산(梧山) 낙성(洛聲)공 재실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미천면 향양리



백촌 선조의 十四세손인 오산처사(梧山處士) 낙성(洛聲)공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인륜과 도덕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一九九二년 건립되었다. 증손 형조를 비롯하여 여러 후손들이 협조하였다.


화강재기(華岡齋記)

대체로 선비가 불우(不遇)한 세상(世上)을 만나서 산곡(山谷)과 초야(草野)에 묻혀서 살면서 그 당시 성명(聲名)이 세상(世上)에 알려지지 못 했으나, 고상(高尙)한 행실(行實)이 후손(後孫)에게 전승(傳承)되고 사모(思慕)하여 잊지 못하는 것은 인륜(人倫)과 도덕(道德)을 숭상(崇尙)하는데 있는 것이며, 자손(子孫)에게 전(傳)하고 싶은 덕목(德目)과 후손(後孫)이 조상(祖上)을 사모(思慕)해마지 않은 것도 인륜(人倫)과 도덕(道德)을 숭상(崇尙)하는데 있는 것이 않을 런지? 오산처사(梧山處士) 김(金)공의 휘(諱)는 낙성(洛聲)이며 단종조(端宗朝) 명신(名臣) 충의(忠義)공 백촌선생(白村先生)의 후손(後孫)이다. 공(公)의 묘(墓)가 미천오방(美川梧坊)에 있고, 후손(後孫)이 삼간재실(三間齋室)을 지어 개심촌(開心村) 숭모당(崇慕堂) 남(南)쪽 그윽한 명당(明堂)인 화강재(華岡齋)라 이름 붙였는데, 그 지명(地名)과 같은 음(音)이다. 증손(曾孫) 형조(炯祚), 형부(炯堛), 형성(炯成)이 전목(顚木)을 기록(記錄)하여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하였다. 나는 생각(生覺)하기를 선비의 고귀(高貴)함은 덕(德)을 숭상(崇尙)하는 확고(確固)한 의지(意志)에 있는 것이다. 공(公)은 어릴 적부터 재예(才藝)가 있었으나 시문(詩文)과 저술(著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의 깊은 뜻을 알고 정심(正心)하고 수신(修身)하는데 힘썼으니, 부모(父母)를 섬기로 집을 다스리고 종족(宗族)을 섬기고 사회생활(社會生活)에 유교(儒敎)의 규범(規範)을 지키고 성인(聖人)의 발자취를 따라가는데 힘썼으니, 명성(名聲)이 어찌 공(公)의 인품(人品)의 경중(輕重)을 논(論)할 수 있겠느냐. 대체로 자손(子孫)이 조선(祖先)을 추모(追慕)하는 방법(方法)은 묘(墓)를 수호(守護)하고 고향(故鄕)을 사랑하고 재실(齋室)을 보존(保存)하는 것만이 최선(最善)은 아니다. 조선(祖先)의 덕행(德行)을 이어가고 조선(祖先)의 가르침을 준수(遵守)하지 못하고 가성(家聲)을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위로는 조선(朝先)의 충절(忠節)과 훈업(勳業)와 정의(正義)와 공적(功績)을 가르치고 효도(孝道)하고 목족(睦族)하는 후손(後孫)을 기르는 것이 공(公)의 소망(所望)이며, 후손(後孫)이 숭조추모(崇祖追慕)의 도(道)도 이것이며, 조선(祖先)에 부끄럼 없는 후손(後孫)이 되는 길도 이것이니,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求)할 길이 없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니 화(華)의 자의(字義)는 밝다는 뜻이다. 정의(正義)를 지키고, 간사함을 물리치고, 성현(聖賢)(孔孟)의 도(道)를 준수(遵守)하고, 이단(異端)을 배척(排斥)하고, 부조(父祖)를 사모(思慕)하고, 종족(宗族)을 보호(保護)하는 것이 화(華)의 뜻이다. 지금 이교세상(異敎世上)이 되어 인륜(人倫)과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예의(禮儀)와 도덕(道德)을 볼 수가 없으니 이 재실(齋室)의 기문(記文)을 지으려고 붓을 잡으니 감회(感懷)가 새로워진다. 재사(齋舍)는 외모(外貌)요, 수신(修身)은 마음의 성실(誠實)에 있는 것이다. 진실(眞實)로 마음이 성실(誠實)하면 재실(齋室)이 영구보존(永久保存) 못 할까 걱정할 필요(必要)가 없는 것이다. 여러 김씨(金氏)들은 마음을 성실(誠實)히 가지는데 힘쓸지어다. 산천경치(山川景致)와 재실(齋室)을 지은 전말(顚末)은 내가 논(論)할 바도 아니고 이 재실(齋室)의 소중(所重)함도 아니니 생략(省略)한다.

一九九一년 여름 완산 이우섭 기(完山 李雨燮 記)
二○○三년 十월 二十九일 일선 김연 역(一善 金煉 譯)


華岡齋記

夫士之生而無所遇於世祐馘沈淪於山林草澤聲名不赫于時而其遺風餘韻猶能使曠代之下誦慕不泯者必有潛行隱德以厚其根無非貽孫之策而後仍之想象興慕顧不在斯也耶梧山處士金公諱洛聲莊陵名臣忠毅公白村先生肖裔而其衣履之藏在所居美川梧坊而後孫構四楹于開心崇慕堂之南奧曠爽塏扁以華岡齋者因地之同音也曾孫炯祚炯堛炯成具其事問記於余余謂士之所貴者在於志之固而德之尙也公雅有才藝而歛○紛華硏尋於經子之旨致力於身心之檢凢事親政家御宗酬世一準儒家規度畢生素履允蹈於古人之轍則在外之名與跡不足爲重輕公也盖子孫之慕先也止於立墓之護桑梓之敬齋宇之保而己則抑末也必春於先德之述兢於嘉謨之墜溯以上之列祖之忠勳義勣無非爲可傚可繼也達以下之子孫之詩禮孝睦無非爲可迪可牖也公之所望於後仍者惟在於是而凢嗣守無忝之道亦舍此何求哉窈念華之義昭然矣衛正而斥邪尊聖道而棑異端慕父祖而庇宗族無非華之道而今夷敎持世倫紀敗壞華夏之道無地可寄則杞筆而記斯齋也重有感焉彼棟宇者在外之貌也念修者在內之實也苟在內之有實則在外之貌不患其不永保也諸金氏其亦朂哉若夫溪山雲物之勝肯構始末之槩非余之○敢論亦非是齋之所重姑畧之

歲辛未 孟夏
完山 李雨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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