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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행편 시(詩)·부(賦)에 능한 우권(禹權)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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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467회 작성일 11-05-1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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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公)의 휘(諱)는 우권(禹權), 자(字)는 국언(國彦), 호(號)는 지엄(旨奄)이시니, 충의공(忠毅公) 백촌선생(白村先生)의 후손(後孫) 휘(諱) 정일(正鎰)공의 아드님으로, 一八四四년 二월 十二일 출생(出生)하셨다. 나면서부터 천자(天資) 영오(穎悟)하시더니, 나이 十五세에 아버님을 여의심에 조석(朝夕)으로 슬퍼하며 통곡(痛哭)하시니, 고을 사람들이 다 감탄(感嘆)하셨다. 그러므로 조부(祖父) 양심재(養心齋)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철없는 아이가 이와 같이 지통지애(至痛至哀)하니 하늘이 낳은 효성(孝誠)이 아니고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겠는가? 반드시 뒷날 영광(榮光)이 있으리라 하시고 뒷날 문사(門事)를 부탁(付託)하셨던 것이다.

그 뒤 취학(就學)한지 얼마 안 되어 소학일부(小學一部)를 읽고 속문(屬文)과 부(賦), 시(詩) 에 능(能)하여 문장(文章)을 기약(期約)할만 하더니, 양산군수(梁山郡守) 황인하(黃仁夏)가 향교(鄕校) 명륜당(明倫堂)에서 선비들을 기르면서 공(公)을 선발(選拔)하여 선생(先生)으로 삼고, 그 문사(文詞)를 보며 크게 칭찬(稱讚)하니, 도백(道伯)이 소문(所聞)을 듣고 낙육재(樂育齋)에 천거(薦擧)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서 장원합격(壯元合格)하셨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쓰셨다. 특(特)히 경전연구(經典硏究)에 정진(精進)하시어 많은 선비를 길러내심에, 향내외(鄕內外)의 수재(秀才)들이 찾아들고 원근(遠近) 친구(親舊)들이 경앙(敬仰)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공(公)의 주옥(珠玉) 같은 시(詩)와 문장(文章)은 이에 조신(操身)하는데도 불후(不朽)의 도움이 될 것이다. 공(公)의 고매(高邁)하신 인품(人品)과 심원(深遠)했던 학문(學問)의 개요(槪要)만을 약술(略述)한다. 一八九六년 二월 一일 고종(考終)하시니, 향년(享年) 五十三세이시다. 마을 서룡리(西龍里) 왼쪽 산록(山麓)에 안장(安葬)되셨다.

사실(事實)이 양산군지(梁山郡誌) 인물편(人物篇) 및 경상도지(慶尙道誌) 등에 기록(記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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