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행편 유고(遺稿) 四권을 남긴 용하(溶夏)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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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405회 작성일 11-05-12 15:43본문
공(公)의 휘(諱)는 용하(溶夏)요, 자(字)는 의경(義卿)이시며, 호(號)는 정산(靜山)이요, 충의공(忠毅)공 휘(諱) 문기(文起)의 十四세손이신 휘(諱) 해성(海聲)공의 아드님이시다. 공(公)은 출생(出生)하시면서부터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하셨고, 인상(印像)이 온화(溫和)하셨으며 도량(度量)이 넓으셨다. 그러므로 조부(祖父) 봉고(鳳皐)공께서는 공(公)의 사람됨을 갸륵히 여기시어, 이 아이는 우리 가문(家門)의 연성벽(連城壁)이라 하시고 교육(敎育)에 전념(專念)하시었다. 十五세에 문장(文章)이 뛰어나 그 작품(作品)이 명작(名作)이었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공의 재조(才操)를 부러워하였다. 二十二세 이전 예천(醴泉)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박일원(朴一源)공과 같이 학문(學問)을 닦으실 때, 일원(一源)공은 공의 재조(才操)를 치하(致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나보다 연소(年少)하지만 나의 선생(先生)이 될 만하다」하였고, 김지암선생(金持菴先生)은 공의 용모(容貌)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물욕(物欲)은 없어지고 도덕(道德)이 발자(發刺)한다」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아 드높은 공의 인격(人格)을 알 수 있다. 고종(高宗) 때 헌릉참봉(憲陵參奉)에 임명(任命)되셨으나 국운(國運)이 기울어지자 벼슬을 그만 두시고, 탄당 김영주선생(坦堂 金永冑先生)과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의 유생(儒生)들에게 격문(檄文)을 보낸 사실(事實)이 탄당문헌(坦堂文獻)에 기록(記錄)되었다. 그 뒤 자신(自身)의 뜻을 펴지 못할 것을 짐작(斟酌)하시고 유생교육(儒生敎育)에 전념(專念)하시면서 선조(先祖)를 위(爲)하고 친족간(親族間)에 화목(和睦)하는 것을 생활신조(生活信條)로 삼으셨다. 공(公)의 저서(著書)로는 유고 사권(遺稿四卷)이 전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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