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편 효부(孝婦) 전주이씨(全州李氏) - 炯俊공 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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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839회 작성일 11-05-12 13:42본문
이씨(李氏)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니 휘(諱) 용흠(鎔欽)의 따님이시다. 충의공(忠毅公) 휘(諱) 문기(文起)의 十七세손이신 휘(諱) 형준공(炯俊公)과 혼인(婚姻)하셨다. 이씨(李氏)는 미모(美貌)에다 총명(聰明)하셨으며, 사리(事理)에도 민첩(敏捷)하시었다. 시집오신 뒤로는 아내로서 부군(夫君)에 대(對)한 도리(道理)를 다하시며, 시부모님께도 효성(孝誠)이 극진(極盡)하셨다.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드리고 수시(隨時)로 거처(居處)의 불편(不便)이 없게 하셨으며, 항상(恒常) 기쁘고 유순(柔順)한 얼굴로 온갖 정성을 다하시었다. 그러나 시댁(媤宅)은 몹시 가난하여 홀시어머님 조차 봉양(奉養)할 길이 없었다. 겨우 이웃 마을 사람의 토지(土地) 수두락(數斗落)을 빌려 경작(耕作)하시면서 부군(夫君)과 함께 열심(熱心)히 매고 가꾸어, 거기에서 생산(生産)된 소출(所出)로 시모님을 봉양(奉養)하시었다. 가운(家運)의 불행(不幸)함인지 어린 자식 하나 없는데다 부군(夫君)은 난치(難治)의 병(病)으로 여러 달 동안 앓다가 마침내 세상(世上)을 떠나니, 이씨(李氏)는 애통(哀痛)하시며 부군(夫君)을 따라 같이 죽고자 하였으나, 생존(生存)하신 노령(老齡)의 시어머님이 가련(可憐)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시었다. 억지로 슬픔을 참고 견디며 정성(精誠)을 다하여 봉양(奉養)에 극진(極盡)하셨다. 시어머님께서도 자식(子息)의 사별(死別)을 애통(哀痛)한 나머지 병(病)이 가중(加重)되어 기거(起居)에 반드시 곁에 사람이 있어야만 했고 더욱 때때로 신음(呻吟)하셨으므로 백방(百方)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하시었다. 혹(或) 약(藥)을 살 돈이 없으면 품을 팔아 받은 돈으로 약(藥)을 사드리고 얻은 음식(飮食)은 반드시 시어머님께 먼저 드린 다음, 자신(自身)도 잡수시었다. 그러므로 이웃 마을 사람들은 이씨(李氏)의 효성(孝誠)에 감동(感動)하여 동정(同情)하는 분들이 있었다. 이렇게 어렵고 고달픈 생활(生活)이 三十여 년 동안 계속(繼續)되었으나 이효부(李孝婦)의 효성(孝誠)은 하루 같이 계속(繼續)되었다. 경북유림(慶北儒林)에서는 부인(夫人)의 소문(所聞)을 듣고 감동(感動)한 바 있어, 이 사실(事實)을 인쇄(印刷)하여 공지(公知)케 하고 비각(碑閣)을 세워, 그 갸륵한 덕(德)을 길이 전(傳)하면서 완의문(完議文)을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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