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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편 효열부(孝烈婦) 밀양박씨(密陽朴氏) - 炯墺공 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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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2,719회 작성일 11-05-1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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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朴氏)의 적(籍)은 밀양(密陽)이니 박재홍(朴在洪)공의 둘째 따님으로 一九○七년 十월 十八일 경주군 양북면 용담동(慶州郡 陽北面 龍潭洞)에서 출생(出生)하셨다. 一九二六년 방년(芳年) 十九세 때 경주군 양남면 나산리(慶州郡 陽南面 羅山里) 三七九번지에 학권공(學權公)의 장자(長子) 형오공과(炯墺公) 혼인(婚姻)하셨다. 당시(當時) 시댁(媤宅)은 위로는 시조모(媤祖母)님과 홀시아버님이 생존(生存)하셨고, 아래로는 수학(修學) 중인 시동생이 있었다. 이러한 층층(層層) 시하(侍下)에다 또 번창(繁昌)한 가문(家門)이었기에 종부(宗婦)로서의 봉제사(奉祭祀)할 선영(先靈)도 많았고, 종가(宗家)가 되다보니, 일도 많아 이를 감당(堪當)하기에는 나이 어린 연약(軟弱)한 여자(女子)의 몸으로서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나 매사(每事)를 반드시 어른께 품신(稟申)한 후 처리(處理)하시면서 부인(婦人)으로서의 해야 할 도리(道理)를 다 하셨으므로 주위(周圍)의 칭찬(稱讚)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주위(周圍)의 칭찬(稱讚)과 가정(家庭)에서 사랑을 받고 행복(幸福)하게 살아가던 중, 一九三七년 불행(不幸)하게도 부군(夫君)이 원인(原因) 모를 병(病)을 얻어 一년 동안 신음(呻吟)하시다가 그해 八월 十四일에 타계(他界)하시니,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하시면서 따라죽고자 하셨으나, 위로 시조모와 시아버님이 생존(生存)하셨고, 아래로는 어린 두 남매(男妹) 그리고 시동생이 있어 차마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당년(當年) 二十九세에 혼자 된 부인(婦人)은 추호(秋毫)의 슬픈 빛을 내색하지 않고 항상(恒常) 밝은 얼굴로 시조모와 시아버님을 극진(極盡)히 봉양(奉養)하시면서 두 남매(男妹)와 시동생의 뒷바라지에도 열(熱)과 성(誠)을 다하셨다. 그러던 이듬해 一九三八년 八十六세의 노령(老齡)인 시조모(媤祖母) 상(喪)을 당(當)하는 등 겹치는 환난(患難)속에서도 이를 극복(克服)하며 사셨다. 그러나 十년 후인 一九四九년에 또 七十세의 노령(老齡)인 시아버님이 중풍(中風)으로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어 기동(起動)을 못하시자 좋다는 약(藥)은 다 구해다가 드리면서 간호(看護)하셨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効)하고 병환(病患)은 더욱 위중(危重)해지니 부인(婦人)은 시아버님의 손발이 되어 식사(食事)때면 밥을 떠먹이고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도 얼굴 한번 찌푸린 적이 없이 八년 동안 병간호(病看護)에 정성을 다하셨다. 시아버님은 마침내 一九五三년 세상(世上)을 떠나시니, 예(禮)를 갖추어 三년 상을 치루셨다.

이러한 고난(苦難)속에서도 낮에는 농사(農事)를 돌보고 밤에는 눈 붙일 새 없이 길쌈을 하여 치산(治産)에도 남 못지않은 살림을 이룩하셨다. 이렇게 살아온 七十년생을 오로지 열(烈)과 효(孝)로서 청춘(靑春)을 불사르고 一九八一년 三월 一일 한(恨)많고 애달픈 생(生)을 마치시니, 고을 사람들은 부인(婦人)을 가리켜 여중군자(女中君子)니 심지어(甚至於)는 대인(大人)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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