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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열편 열부(烈婦) 경주김씨(慶州金氏) - 炯哲공 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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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댓글 0건 조회 3,324회 작성일 11-05-1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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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는 백촌선조의 十七세손 형철(炯哲)공의 배위(配位)시다. 남편이 소실을 얻었으되 투기하지 아니하고 四남 一녀를 잘 길렀으며 남편이 중풍으로 三년 동안 눕자 간호를 성심껏 하고 운명하려 함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넣어드려 三일을 연명케 하였다.


한산향교 유도회 유장(韓山鄕校 儒道會 儒狀)

대저 부부(夫婦)라 함은 생민(生民)의 시발점이요, 만복(萬福)의 근원이다. 그 뜻이 중후(重厚)하여 하늘과 땅을 본받았으며 이것이 곧 인륜(人倫)의 가장 큰 근본이다. 그러나 그 역경(逆境)을 만나면 또한 그대로 올바른 행실을 준행(遵行)하는 자 극히 드물다.

본군 마사면 안당리(本郡 馬山面 安堂里)에 살았던 옛 김아기(金兒奇) 여사(女史)는 경주김씨(慶州金氏) 태사공(太史公) 二十六세손 상근(商根)의 四녀이며 김녕후인(金寧后人) 충의공(忠毅公) 휘(諱) 백촌선생(白村先生)의 十七세손 형철(炯哲)의 아내이다. 나이 겨우 十四살 때에 김씨(金氏)의 문(門)에 출가(出嫁)하여 효도로 시부모를 섬기고 정성으로 남편을 받들었다. 나이 二十三세에 남편이 우연히 소실(小室)을 맞아들여 한 집에서 같이 살았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온화한 얼굴로 더욱 남편의 뜻을 받들어 물을 긷고 방아 찧으며 청소하고 밥 짓는 일을 몸소 행하였으나 조금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투기하는 마음을 일찍이 밖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규범을 지켜 八년을 한결 같이 편안하게 적응을 하였다. 그 뒤 소실(小室)과 분거(分居)하였는데 남편의 성질이 괴팍하고 가혹(苛酷)하여 부인을 생각지 않고 가사(家事)를 돌보지 아니하니 먹고 살기가 힘들어 겨우 잔명(殘命)을 부지하면서 혹 산에 가서 나무하고 혹 들에 가서 나물을 캐서 먹으며 밤낮으로 길쌈을 하여 四남 一녀를 기르면서 부도(婦道)를 잃지 아니하고 자식들을 올바르게 교육시켰다.

이렇게 생활한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소실부인(小室夫人)이 四남을 남겨두고 일찍 죽으니 또한 자애(慈愛)로운 마음으로 그 자식들을 길러 각각 성취시키었다. 남편이 말년에 풍증(風症)에 걸려 三년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니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간호하여 숟가락으로 죽을 권하고 그 더러운 것을 씻어주어 거처(居處)를 편안케 하였다. 더욱 병이 악화되어 죽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입하여 三일 동안 명을 연장하고 三년 상(喪)을 예(禮)를 극진히 하여 치르니 아! 장하도다.

요즈음 세도(世道)가 쇠미(衰微)하여 장차 금수(禽獸)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이때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행실은 과연 많은 닭 가운데 한 마리 학(鶴)의 절개이며 퇴폐한 풍속을 바로 잡는데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삼가 동보(洞報)를 안찰(按察)하고 흠탄(欽歎)함을 금(禁)치 못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사실에 근거한 일단(一端)의 기록을 적어 훗날 문덕(文德)이 높은 군자(君子)의 입언(立言)을 기다리노라.

공부자탄강(孔夫子誕䧏) 二五二二년(壬戌) 三월

한산향교 전교 정규홍(韓山鄕校 典校 丁奎弘)
유도회지부장 권혁성(儒道會支部長 權赫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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